故 이태석 신부가 뿌린 사랑, 의사 57명으로 '부활'하다

by admin posted May 22,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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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故 이태석 신부가 뿌린 사랑, 의사 57명으로 '부활'하다

 

SBS 조을선 기자

불교신자인 감독은 왜, 은퇴자금을 털어 사제의 삶을 조명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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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라는 문자 한 통

바쁜 아침 출근길, 문자 한 통을 받았습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남수단의 슈바이처'라 불린 故 이태석 신부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에 이어 영화 <부활>을 연출한 구수환 감독이었습니다.

특히, 최근작인 다큐멘터리 영화 <부활>은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의료 봉사하던 이태석 신부가 48세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10년 뒤, 어린 제자들이 성장하며 벌어진 기적을 감동적으로 조명해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불교 신자임에도 가톨릭 사제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를 연이어 제작하고, 시사고발 피디 출신임에도 따뜻한 사랑을 담은 영화를 제작해 더욱 눈길을 끈 감독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구수환 감독에게서 미안하다는 메시지라니 대체 무슨 일일까? 회사로 재촉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찬찬히 문자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요지는 다큐멘터리 영화 <부활>이 6개월 만에 전국의 주요 영화관에서 3월 26일 재개봉을 하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상업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렇게 재개봉을 하는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렇게 좋은 소식에 그는 왜 미안했던 걸까?

일단 축하의 인사를 남기고, 며칠 뒤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대뜸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기자 : 감독님, 좋은 일인데 왜 제게 미안하시단 겁니까?

구수환 감독 : 더 많은 사람들이 이태석 신부의 삶을 보고, 그들도 행복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영화 <부활>을 제작했습니다. 이번에 감사하게도 재개봉을 하게 돼 혼자서 전국을 다니며 이 영화를 알리려고 하다 보니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제가 연락해 괜히 부담이 될까 봐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리게 됐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영화를 다시 상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가 재개봉한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여건도, 시간도 부족해 고민이 많습니다. 이번 상영은 기간도 짧고, 상영 횟수도 대부분 하루 한 차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극장에선 관객 수를 보고 확대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합니다. 코로나19로 힘겨운 시간을 보낸 극장 입장에선 관객 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기자 : 그런데도 감독님은 홍보대행사 없이 이렇게 홀로 영화를 직접 알리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구수환 감독 : 이태석 신부의 삶을 정확히 이해하고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홍보대행사를 통해 알리면 관객은 더 올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지난 10년 간 이태석 신부의 삶의 궤적을 따라 조명하며, 그분의 삶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가 설명하면 조금 더 신뢰해주실 거라는 생각에 전국을 혼자서 뛰어다녔습니다.
 

 

가난한 마을, 그가 지은 허름한 학교에서 벌어진 기적

기자 : 다큐멘터리 영화 <울즈마 톤즈>에 이어서 영화 <부활>을 제작하시게 된 계기가 특별히 있었나요?

감독 : 이 영화는 사비를 털어 제작했습니다. 돈을 벌려고 만든 영화가 아니고, 사연이 있었습니다. 이태석 신부의 형, 이태영 신부가 지난 2019년에 59세의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깡마른 모습으로 저를 불러 두 가지 유언을 남기셨어요. 하나는 이태석 재단을 계속 이끌어가 달라, 다른 하나는 이태석 신부 선종 10주기에 동생의 삶을 정리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태영 신부에게, 영화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어요. 이태영 신부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기에 제가 용기를 드리려고 웃으면서 '신부님도 인터뷰하셔야합니다'라고 말씀 드렸어요. 그런데 영화를 제작하기 전에 이태영 신부는 돌아가셨고, 저는 꼭 약속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태석 신부의 삶을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하던 차에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에 작은 학교를 짓고 가르쳤던 어린 제자들이 생각났습니다. 제자들을 수소문했더니, 놀랍게도 이태석 신부처럼 의사가 됐거나 의대에 다니는 제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남수단에 찾아갔더니 의대생이 된 제자 16명이 나와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의사거나 의대생이 된 제자가 무려 57명에 달했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남수단 작은 톤즈 마을에 신부님이 지은 허름한 학교에서 6년 만에 국립대 의대생 57명이 나온 것입니다. 그 작고 가난한 마을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후 공무원, 대통령실 경호원, 언론인까지 모두 70명의 제자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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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 신부가 저희 곁에 돌아왔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제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아이들이 먹고살기 위해 의사가 된 것이 아니라 신부님 때문에 의사가 됐고 신부님처럼 살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제자들이 병원에서 진료하는 모습을 보니 먼저 '어디가 아프세요?' 묻는 것이 아니라 환자 손부터 잡는 거예요. 가는 곳마다 손을 잡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뒤 진료를 하기에,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이태석 신부님이 해오던 진료 방법입니다'라고 답하더군요. '아이들이 신부님의 삶을 그대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기뻐서 영화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이태석 신부 제자들이 한센인 마을에 가서 봉사 진료를 했어요. 60명 정도 사는 마을인데 환자 300명 정도가 모였어요. 의사가 없으니 주변 마을에서 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거예요. 제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쫄딱 굶으며 진료를 했어요. 어느 환자는 12년 만에 진료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환자에게 '의사가 당신 손을 잡았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물었더니 '이태석 신부님이 저희 곁에 돌아온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마음이 울컥했어요. 제자들은 '신부님이 우리 옆에 계신 거 같았습니다. 신부님 일을 우리가 대신해서 너무 기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단순히 제자들이 좋은 일을 했다는 게 아니라, 이태석 신부의 사랑이라는 것이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가는구나, 이것이야말로 부활의 의미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영화 제목은 <우리가 이태석입니다>였는데, 그 자리에서 제목을 <부활>로 바꿨습니다.

벤자민이라는 제자는 에티오피아에서 전문의 과정을 밟다가 코로나19로 학교가 문을 닫자, 수단으로 돌아갔어요. 어디로 갔는지 통 연락이 안 되어서 찾아보니 톤즈 마을 작은 보건소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더라고요. 다들 스스로 이태석 신부의 제자라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어요. 다른 제자들은 아직 의대생이지만, 한센인 마을을 계속 찾아 진료하겠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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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빠져든 이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간 방식

기자 : 제자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제자들에게 큰 사랑을 남기고 간 이태석 신부의 삶이 더 궁금해집니다. 이태석 신부가 처음에 남수단 톤즈 마을에 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구수환 감독 : 이태석 신부가 톤즈 간 이유는 사실은 한센인 마을 때문이었어요. 신부는 로마 바티칸에서 사제 서품을 받기 전,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 수도원에 갔습니다. 그때, 제임스라는 인도 신부가 와서 이태석 신부에게 갈 데가 있다며 어딘가로 데려갔다고 해요. 그곳이 바로 남수단의 톤즈 마을 안에 있는 한센인 마을이었어요. 제임스 신부는 의사 출신의 신부가 아프리카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센인 마을에 의사가 없어 환자들이 죽어가니 진료 좀 해달라고 다짜고짜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이태석 신부는 처음 한 달 동안 참혹한 삶을 목격했어요. 환자들 온몸에 고름이 흐르고 먹지도 못해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해요. 이태석 신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로마로 가서 사제 서품을 받고 다시 오겠다 약속했지만, 한센인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죠. 그런데, 정말 1년 후 이태석 신부가 다시 나타났지요. 마을 사람들이 많이 놀랐다고 해요.

신부는 그렇게 톤즈 마을에서 하루에 3백 명씩 진료하고, 학교를 지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마을 사업도 도와주고, 매일 같이 한센인 마을을 찾아가 진료를 하고 식량을 나눠줬어요. 환자들의 일그러진 발을 직접 씻겨주고 치료해줬다고 해요. 무엇보다 한센인 마을에 가서 계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신부만 오면 모두 나와서 자신들의 고민거리를 다 이야기했어요. 신부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넘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해결해주려 골몰했어요. 어느 날은 이태석 신부가 한센병 환자들에게 신발을 신겨주었어요. 이전까지 이들은 맨발로 걸어 다녔는데, 치료약이 없다 보니 상처가 생기면 곪고 썩어 결국 발가락을 잘라내야 했기 때문이죠. 신부님 생각에 환자들이 슬리퍼를 신으면 상처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제가 이태석 신부에게 빠져든 것은 단순히 그분의 봉사 때문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간 방식' 때문이었어요. 그것을 우리 사회에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일까요. 한센병 환자들은 고통 속에서도 신부님 이야기만 꺼내면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를 존경스럽게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자 : 이태석 신부의 삶은 너무 숭고하게만 느껴지는데,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현실적인 메시지도 있었습니까?

구수환 감독 : 이태석 신부를 존경스럽게 만들거나, 그를 보고 감동받게 하려고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살았던 삶은, 누구든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이태석 신부가 보였던 경청의 태도를 예로 들어볼게요. 학교에서 영화를 보여준 뒤 학생들에게 물었어요. '너희는 반에서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는 사람이 좋니,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 좋니' 물으면, 다들 '자기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이 좋다'고 답해요. 영화를 통해 우리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영화 <울지마 톤즈>에서는 이태석 신부의 삶을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서번트 리더십과, 경청하고 공감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는 삶이 이태석 신부의 인생이었지요. 영화 <울지마 톤즈>에서는 이런 삶에서 감동을 느낀다면 일상에서 실천해보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영화 <부활>은 10년 전 막연하게 꿈꾸었던 것이 정말 현실이 된 것이에요. 아이들은 이태석 신부의 삶을 따랐고, 결국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뒤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삶을 사는 감격스러운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우리가 이태석 신부가 됐을 때 사회는 굉장히 행복해진다는 게 부활의 핵심이에요.

신부님께 죄송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신부님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웃음) 저는 최고로 행복한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요.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삶은 뜻대로 안 되고, 불만투성이었을텐데 말이죠. 그분 통해 이야기하며 즐겁고, 하는 일에 굉장히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고발 영화'입니다. 가장 강력한 고발은 '사랑'입니다"

기자 : 감독님은 오랫동안 시사 고발 피디로 활동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태석 신부에 관한 휴먼 영화, 종교 영화를 제작하게 되셨습니까?

구수환 감독 : 사람들은 이 영화가 감동 영화, 휴먼 영화, 종교 영화라고 부르지만, 이건 굉장히 강한 고발 영화예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고발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사 고발을 전문적으로 하는 피디였습니다. 시사 프로그램을 30년, 고발 프로그램을 10년 이상 했습니다. 이 영화도 사랑을 통해서 부당한 권력을 고발하고, 이기주의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좋은 사회를 만들까'가 피디들의 목표인데, 이 영화를 본 분들이 이기적인 삶을 스스로 반성하시는 거예요. 수많은 고발 프로그램을 제작해도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건 어려웠는데, 이 영화를 통해 많은 분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 하나의 기준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성직자의 성폭력 문제, 권력 분쟁, 세습 이슈가 나올 때마다 '이태석 신부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냐'라는 글들이 나왔습니다. 이태석 신부가 성직자에 대한 하나의 기준이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부 의료진들과 교사들, 정치인들에 관한 사회적 문제가 터져 나올 때에도 의사로서, 교육자로서, 지도자로서의 바람직한 상으로 회자되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영화 흥행보다도 이런 부분에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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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 사태, 법을 강화하면 정말 달라질까요?"

최근 LH 투기 사태가 심각하게 불거졌는데, 부동산 투기 문제는 1990년대부터 있었던 얘기이고 수법도 똑같습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아무리 강화된 법이 제정되고, LH 직원들이 토지 소유를 못하게 하면 정말 달라질까요? 다른 사람 시켜서 차명으로 투기할 수 있는데 말이죠. 이 문제는 수법과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의 특권을 없애지 않는 한 국민을 실망시키는 행위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툭하면 법을 강화하는데, 우리에게는 이미 좋은 법과 제도가 있습니다. 법과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이를 운영하고, 지키는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보와 권한이 있는 LH 직원이 '억울하면 공부해서 LH에 들어오라'는 특권 의식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서민들이 집을 꼭 마련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영화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정치 지도자와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 사제의 삶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북유럽 정치인들의 삶은 이태석 신부의 삶과 똑 닮아있었습니다. 독일 메르켈 총리 비롯한 북유럽 국가의 정치인들의 삶을 다큐멘터리 5부작으로 제작한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아주 작은 사무실로 출퇴근했습니다. 보좌관 없이 수많은 법안을 직접 작성해 제출하고, 국민들이 정보공개 청구한 내역을 스스럼없이 전부 공개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어느 신적인 사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 속 인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불교 신자가 왜 신부의 삶을 조명했나.."우리사회 '리더십 방향' 제시" 

기자 : 감독님은 불교 신자라고 들었습니다. 가톨릭 사제인 이태석 신부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계속 제작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구수환 감독 : 종교의 역할이 무엇일까요?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야 하는데, 이태석 신부는 그 삶 그대로였습니다. 법복 입은 스님이든, 예복 입은 목사든, 사제복을 입은 신부든, 종교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신부님의 삶을 보며 그것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정진석 추기경이 감사패를 주신다고 해서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대화 중에 제가 '저는 톤즈 마을에서 예수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상하잖아요, 불교 신자가 예수님을 보고 왔으니까요. '당신이 본 예수는 어떤 분이었습니까'하고 물으시기에 '제가 본 예수님은 대단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제 마음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톤즈 성당은 여기처럼 으리으리하지 않습니다. 허름한 성당에 벽은 포를 맞아서 구멍이 뚫렸는데, 사람들이 성당만 들어오면 얼굴이 밝아지는 걸 봤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의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정진석 추기경님이 '부끄럽습니다'라고 이야기하시더군요.

지금 경제적, 이념적 양극화가 심각해지고 사회적 갈등이 심화하고 있지만 정치권과 사회 지도자들이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이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는 주범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갈등이 심각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이태석 신부의 리더십이 의미있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태석 신부의 헌신과 실천, 화합, 섬김의 리더십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세계적인 리더십 센터 그린리프의 켄트 키스 소장은 “이태석 신부의 삶이 섬기는 지도자의 정확한 사례”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이태석 신부의 리더십 상을 우리 사회에 알리고 확산하는 것만으로 위선과 갈등으로 점철된 정치권 등 사회 곳곳에 큰 경종을 울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비 털어 <부활> 제작...적자지만 적자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자 : 외람된 질문일 수 있겠지만, 영화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하셨나요? 그리고 수익은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 있을까요?

구수환 감독 : 영화 제작비로 3억 원 정도 들었습니다. 협찬은 받지 않고, 사비로 제작했습니다. 이태석 신부의 형인 이태영 신부의 유언으로 맡게 된 일이라, 당시 돈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일단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저의 은퇴 자금과 어머님, 여동생이 보태준 돈으로 비용을 마련했습니다. 제가 이태석 재단에서 10년 간 일한 것을 가족들이 다 알고 있어서, 두말 않고 도와주었어요.

수익으로는 영화관 입장 수익의 절반으로 5천만 원을 받았습니다. 2억 5천만 원 적자지만, 적자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신부님 삶을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 개인적인 기쁨을 넘어 숙명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재개봉은 제게 정말 큰 의미입니다. 첫 개봉 당시 14만 명이 아닌 1만 4천 명이 관람했는데 영화관 입장에선 재개봉이 도박일 수 있습니다. 원래 이 영화를 이제 영화관 아닌 곳에 틀까 생각한 적도 있는데, CGV 쪽에서 '그 영화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그 영화 아무데서나 틀지 마세요'라고 하더군요. CGV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자신감을 얻고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 필름포럼에도 연락했습니다.

처음에는 부활절 앞두고 5~6곳에 틀어야지 생각했는데, 영화관 수가 계속 늘어나서 전국 47곳으로 늘었습니다. 영화관마다 주요 지점에 있는 극장에서 상영하겠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감사해서, 열심히 알려야겠구나 생각하고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고구마 캐고, 보리쌀 배달해 보내주신 후원금인데..."

기자 : 영화 이야기에서 약간 빗겨 나, 현재 이사장으로 계신 '이태석 재단'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이태석 재단도 영화 <부활>의 제자들처럼 생전 이태석 신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까?

구수환 감독 : 이태석 신부의 형 이태영 신부가 돌아가신 뒤 지난해부터 제가 이태석 재단의 이사장을 맡게 됐습니다. 재단은 남수단 의대생들이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지원하고, 한센인 마을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이태석 신부의 삶의 가치를 일반인에게 알리고 실천을 돕는 교육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 이태석 재단은 어떤 기금으로 운영되고 있나요? 어려움은 없는지요?

구수환 감독 : 후원자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됩니다. 지난해 한 여성의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87세인 자신의 어머니가 고구마를 캐서 번 돈, 자전거를 타고 보리쌀을 배달해서 번 돈을 모아 재단에 후원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사장이라는 이유로 후원금으로 밥 한 끼 먹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태석 재단은 모든 돈은 사적으로 쓰지 않고, 모든 경비는 각자 사비를 들여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투명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신부님의 삶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은 투병 중에도 목숨을 걸고 봉사했는데, 저희가 사람들에게 이태석 신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명분을 찾으려면 그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자 : 그래도 최소한의 월급은 받으시겠지요?

구수환 감독 : 이사장 월급은 없습니다. 사무국장 단 한 사람만 월급을 받고, 이사장과 이사들, 지부 실무자들, 모두 다 봉사직입니다. 후원금은 그대로 장학 사업과 교육 사업에 쓰이고 있습니다. 영화 <부활> 이후에 진심이 통한 것 같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오히려 후원자들이 6백 명에서 1천 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는 힘이 있어 버티고 있습니다. 앞으로 전진만 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 후원 가입을 해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습니다. 고발 프로그램을 많이 했고, 재단의 문제를 잘 알기 때문에 더 조심하고, 재단의 올바른 운영 모델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교과서로 기억됐으면"

기자 : 가장 기억에 남는 관객의 평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구수환 감독 : '영화를 보며 세 번 울었다'는 평이 기억에 남습니다. 첫 번째는 남수단 제자들이 '고향의 봄' 노래를 연주할 때, 두 번째는 제자들이 한센인 마을에서 진료할 때, 그리고 세 번째는 제자들이 이태석 신부의 묘지 앞에 의사 자격증과 약사 자격증, 대학 졸업장을 올려놓고 통곡할 때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영화 <울지마 톤즈>의 울음은 그리움과 슬픔이었는데 이번 영화 <부활>에서의 울음은 굉장히 희망적인 울음이었다는 평이 기억에 남습니다.

기자 :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구수환 감독 : 단 한 분이라도 더 영화를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의 삶을 통해 '이렇게 사는 것이 진짜 행복이구나', 확신을 갖게 되시면 좋겠습니다. 영화 <부활>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교과서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영화관 가기 겁난다고 이야기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속 마크스 쓰시고 꼭 보시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삶이 많이 지쳐있고 짜증스럽기도 합니다. 사회에는 온통 싸움투성이입니다. 힘든 시기에, 여러분에게 행복과 위안을 주는 영화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취재·구성 : 조을선, 사진 : 구수환 감독 제공)   
 
수정2021.03.25. 오후 3:48

 

 

SBS 조을선 기자

 

불교신자인 감독은 왜, 은퇴자금을 털어 사제의 삶을 조명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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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합니다"라는 문자 한 통

바쁜 아침 출근길, 문자 한 통을 받았습니다. "미안합니다"라는 메시지였습니다. '남수단의 슈바이처'라 불린 故 이태석 신부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마 톤즈>에 이어 영화 <부활>을 연출한 구수환 감독이었습니다.

특히, 최근작인 다큐멘터리 영화 <부활>은 아프리카 남수단에서 의료 봉사하던 이태석 신부가 48세에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10년 뒤, 어린 제자들이 성장하며 벌어진 기적을 감동적으로 조명해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불교 신자임에도 가톨릭 사제의 삶을 조명하는 영화를 연이어 제작하고, 시사고발 피디 출신임에도 따뜻한 사랑을 담은 영화를 제작해 더욱 눈길을 끈 감독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구수환 감독에게서 미안하다는 메시지라니 대체 무슨 일일까? 회사로 재촉하던 발걸음을 멈추고 찬찬히 문자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요지는 다큐멘터리 영화 <부활>이 6개월 만에 전국의 주요 영화관에서 3월 26일 재개봉을 하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상업 영화가 아닌 다큐멘터리 영화가 이렇게 재개봉을 하는 건 이례적인 일입니다. 이렇게 좋은 소식에 그는 왜 미안했던 걸까?

일단 축하의 인사를 남기고, 며칠 뒤 그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대뜸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습니다.

기자 : 감독님, 좋은 일인데 왜 제게 미안하시단 겁니까?

구수환 감독 : 더 많은 사람들이 이태석 신부의 삶을 보고, 그들도 행복해지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영화 <부활>을 제작했습니다. 이번에 감사하게도 재개봉을 하게 돼 혼자서 전국을 다니며 이 영화를 알리려고 하다 보니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제가 연락해 괜히 부담이 될까 봐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리게 됐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영화를 다시 상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가 재개봉한다는 것을 알릴 수 있는 여건도, 시간도 부족해 고민이 많습니다. 이번 상영은 기간도 짧고, 상영 횟수도 대부분 하루 한 차례밖에 되지 않습니다. 극장에선 관객 수를 보고 확대 여부를 판단하겠다고 합니다. 코로나19로 힘겨운 시간을 보낸 극장 입장에선 관객 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기자 : 그런데도 감독님은 홍보대행사 없이 이렇게 홀로 영화를 직접 알리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구수환 감독 : 이태석 신부의 삶을 정확히 이해하고 전하고 싶었습니다. 아마도 홍보대행사를 통해 알리면 관객은 더 올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지난 10년 간 이태석 신부의 삶의 궤적을 따라 조명하며, 그분의 삶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직접 찾아가 설명하면 조금 더 신뢰해주실 거라는 생각에 전국을 혼자서 뛰어다녔습니다.
 

 

가난한 마을, 그가 지은 허름한 학교에서 벌어진 기적

기자 : 다큐멘터리 영화 <울즈마 톤즈>에 이어서 영화 <부활>을 제작하시게 된 계기가 특별히 있었나요?

감독 : 이 영화는 사비를 털어 제작했습니다. 돈을 벌려고 만든 영화가 아니고, 사연이 있었습니다. 이태석 신부의 형, 이태영 신부가 지난 2019년에 59세의 나이로 선종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 깡마른 모습으로 저를 불러 두 가지 유언을 남기셨어요. 하나는 이태석 재단을 계속 이끌어가 달라, 다른 하나는 이태석 신부 선종 10주기에 동생의 삶을 정리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태영 신부에게, 영화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어요. 이태영 신부는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었기에 제가 용기를 드리려고 웃으면서 '신부님도 인터뷰하셔야합니다'라고 말씀 드렸어요. 그런데 영화를 제작하기 전에 이태영 신부는 돌아가셨고, 저는 꼭 약속을 지켜야 했습니다.

이태석 신부의 삶을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하던 차에 이태석 신부가 남수단에 작은 학교를 짓고 가르쳤던 어린 제자들이 생각났습니다. 제자들을 수소문했더니, 놀랍게도 이태석 신부처럼 의사가 됐거나 의대에 다니는 제자들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남수단에 찾아갔더니 의대생이 된 제자 16명이 나와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의사거나 의대생이 된 제자가 무려 57명에 달했습니다.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남수단 작은 톤즈 마을에 신부님이 지은 허름한 학교에서 6년 만에 국립대 의대생 57명이 나온 것입니다. 그 작고 가난한 마을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후 공무원, 대통령실 경호원, 언론인까지 모두 70명의 제자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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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 신부가 저희 곁에 돌아왔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제자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아이들이 먹고살기 위해 의사가 된 것이 아니라 신부님 때문에 의사가 됐고 신부님처럼 살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제자들이 병원에서 진료하는 모습을 보니 먼저 '어디가 아프세요?' 묻는 것이 아니라 환자 손부터 잡는 거예요. 가는 곳마다 손을 잡고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뒤 진료를 하기에,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이 '이태석 신부님이 해오던 진료 방법입니다'라고 답하더군요. '아이들이 신부님의 삶을 그대로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기뻐서 영화를 본격적으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은 이태석 신부 제자들이 한센인 마을에 가서 봉사 진료를 했어요. 60명 정도 사는 마을인데 환자 300명 정도가 모였어요. 의사가 없으니 주변 마을에서 다 소식을 듣고 찾아온 거예요. 제자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쫄딱 굶으며 진료를 했어요. 어느 환자는 12년 만에 진료를 받았다고 하더군요. 환자에게 '의사가 당신 손을 잡았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물었더니 '이태석 신부님이 저희 곁에 돌아온 것 같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마음이 울컥했어요. 제자들은 '신부님이 우리 옆에 계신 거 같았습니다. 신부님 일을 우리가 대신해서 너무 기쁩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단순히 제자들이 좋은 일을 했다는 게 아니라, 이태석 신부의 사랑이라는 것이 제자들을 통해서 계속 이어가는구나, 이것이야말로 부활의 의미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영화 제목은 <우리가 이태석입니다>였는데, 그 자리에서 제목을 <부활>로 바꿨습니다.

벤자민이라는 제자는 에티오피아에서 전문의 과정을 밟다가 코로나19로 학교가 문을 닫자, 수단으로 돌아갔어요. 어디로 갔는지 통 연락이 안 되어서 찾아보니 톤즈 마을 작은 보건소에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더라고요. 다들 스스로 이태석 신부의 제자라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어요. 다른 제자들은 아직 의대생이지만, 한센인 마을을 계속 찾아 진료하겠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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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빠져든 이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간 방식

기자 : 제자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제자들에게 큰 사랑을 남기고 간 이태석 신부의 삶이 더 궁금해집니다. 이태석 신부가 처음에 남수단 톤즈 마을에 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구수환 감독 : 이태석 신부가 톤즈 간 이유는 사실은 한센인 마을 때문이었어요. 신부는 로마 바티칸에서 사제 서품을 받기 전,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 수도원에 갔습니다. 그때, 제임스라는 인도 신부가 와서 이태석 신부에게 갈 데가 있다며 어딘가로 데려갔다고 해요. 그곳이 바로 남수단의 톤즈 마을 안에 있는 한센인 마을이었어요. 제임스 신부는 의사 출신의 신부가 아프리카에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센인 마을에 의사가 없어 환자들이 죽어가니 진료 좀 해달라고 다짜고짜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이태석 신부는 처음 한 달 동안 참혹한 삶을 목격했어요. 환자들 온몸에 고름이 흐르고 먹지도 못해 죽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해요. 이태석 신부는 마을 사람들에게 로마로 가서 사제 서품을 받고 다시 오겠다 약속했지만, 한센인 마을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죠. 그런데, 정말 1년 후 이태석 신부가 다시 나타났지요. 마을 사람들이 많이 놀랐다고 해요.

신부는 그렇게 톤즈 마을에서 하루에 3백 명씩 진료하고, 학교를 지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마을 사업도 도와주고, 매일 같이 한센인 마을을 찾아가 진료를 하고 식량을 나눠줬어요. 환자들의 일그러진 발을 직접 씻겨주고 치료해줬다고 해요. 무엇보다 한센인 마을에 가서 계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신부만 오면 모두 나와서 자신들의 고민거리를 다 이야기했어요. 신부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넘어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해결해주려 골몰했어요. 어느 날은 이태석 신부가 한센병 환자들에게 신발을 신겨주었어요. 이전까지 이들은 맨발로 걸어 다녔는데, 치료약이 없다 보니 상처가 생기면 곪고 썩어 결국 발가락을 잘라내야 했기 때문이죠. 신부님 생각에 환자들이 슬리퍼를 신으면 상처가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제가 이태석 신부에게 빠져든 것은 단순히 그분의 봉사 때문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간 방식' 때문이었어요. 그것을 우리 사회에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일까요. 한센병 환자들은 고통 속에서도 신부님 이야기만 꺼내면 환하게 웃었습니다.
 

"그를 존경스럽게 만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기자 : 이태석 신부의 삶은 너무 숭고하게만 느껴지는데,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현실적인 메시지도 있었습니까?

구수환 감독 : 이태석 신부를 존경스럽게 만들거나, 그를 보고 감동받게 하려고 의도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살았던 삶은, 누구든 현실에서 실천할 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이태석 신부가 보였던 경청의 태도를 예로 들어볼게요. 학교에서 영화를 보여준 뒤 학생들에게 물었어요. '너희는 반에서 이야기를 많이 들어주는 사람이 좋니,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는 사람이 좋니' 물으면, 다들 '자기 이야기 들어주는 사람이 좋다'고 답해요. 영화를 통해 우리도 그런 삶을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영화 <울지마 톤즈>에서는 이태석 신부의 삶을 통해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서번트 리더십과, 경청하고 공감하고 진심으로 대하는 태도, 공동체를 소중히 여기는 삶이 이태석 신부의 인생이었지요. 영화 <울지마 톤즈>에서는 이런 삶에서 감동을 느낀다면 일상에서 실천해보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영화 <부활>은 10년 전 막연하게 꿈꾸었던 것이 정말 현실이 된 것이에요. 아이들은 이태석 신부의 삶을 따랐고, 결국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뒤 이태석 신부와 같은 삶을 사는 감격스러운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우리가 이태석 신부가 됐을 때 사회는 굉장히 행복해진다는 게 부활의 핵심이에요.

신부님께 죄송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신부님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웃음) 저는 최고로 행복한 저널리스트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고 있었을까요. 하고 싶은 건 많은데 삶은 뜻대로 안 되고, 불만투성이었을텐데 말이죠. 그분 통해 이야기하며 즐겁고, 하는 일에 굉장히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고발 영화'입니다. 가장 강력한 고발은 '사랑'입니다"

기자 : 감독님은 오랫동안 시사 고발 피디로 활동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태석 신부에 관한 휴먼 영화, 종교 영화를 제작하게 되셨습니까?

구수환 감독 : 사람들은 이 영화가 감동 영화, 휴먼 영화, 종교 영화라고 부르지만, 이건 굉장히 강한 고발 영화예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고발은 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시사 고발을 전문적으로 하는 피디였습니다. 시사 프로그램을 30년, 고발 프로그램을 10년 이상 했습니다. 이 영화도 사랑을 통해서 부당한 권력을 고발하고, 이기주의를 고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좋은 사회를 만들까'가 피디들의 목표인데, 이 영화를 본 분들이 이기적인 삶을 스스로 반성하시는 거예요. 수많은 고발 프로그램을 제작해도 누군가를 변화시키는 건 어려웠는데, 이 영화를 통해 많은 분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 사회 하나의 기준을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성직자의 성폭력 문제, 권력 분쟁, 세습 이슈가 나올 때마다 '이태석 신부처럼 살아야 하지 않겠냐'라는 글들이 나왔습니다. 이태석 신부가 성직자에 대한 하나의 기준이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부 의료진들과 교사들, 정치인들에 관한 사회적 문제가 터져 나올 때에도 의사로서, 교육자로서, 지도자로서의 바람직한 상으로 회자되더라고요. 개인적으로는 영화 흥행보다도 이런 부분에서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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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 사태, 법을 강화하면 정말 달라질까요?"

최근 LH 투기 사태가 심각하게 불거졌는데, 부동산 투기 문제는 1990년대부터 있었던 얘기이고 수법도 똑같습니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아무리 강화된 법이 제정되고, LH 직원들이 토지 소유를 못하게 하면 정말 달라질까요? 다른 사람 시켜서 차명으로 투기할 수 있는데 말이죠. 이 문제는 수법과 행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의 특권을 없애지 않는 한 국민을 실망시키는 행위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슈가 불거질 때마다 툭하면 법을 강화하는데, 우리에게는 이미 좋은 법과 제도가 있습니다. 법과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이를 운영하고, 지키는 '사람'의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정보와 권한이 있는 LH 직원이 '억울하면 공부해서 LH에 들어오라'는 특권 의식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서민들이 집을 꼭 마련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한다면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영화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정치 지도자와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 사제의 삶을 현실에 적용하려고 하느냐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북유럽 정치인들의 삶은 이태석 신부의 삶과 똑 닮아있었습니다. 독일 메르켈 총리 비롯한 북유럽 국가의 정치인들의 삶을 다큐멘터리 5부작으로 제작한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자전거를 타고 아주 작은 사무실로 출퇴근했습니다. 보좌관 없이 수많은 법안을 직접 작성해 제출하고, 국민들이 정보공개 청구한 내역을 스스럼없이 전부 공개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어느 신적인 사제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 속 인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불교 신자가 왜 신부의 삶을 조명했나.."우리사회 '리더십 방향' 제시" 

기자 : 감독님은 불교 신자라고 들었습니다. 가톨릭 사제인 이태석 신부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계속 제작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구수환 감독 : 종교의 역할이 무엇일까요?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줘야 하는데, 이태석 신부는 그 삶 그대로였습니다. 법복 입은 스님이든, 예복 입은 목사든, 사제복을 입은 신부든, 종교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사람들이 의지할 수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신부님의 삶을 보며 그것을 느꼈습니다.

어느 날 정진석 추기경이 감사패를 주신다고 해서 방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대화 중에 제가 '저는 톤즈 마을에서 예수를 보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상하잖아요, 불교 신자가 예수님을 보고 왔으니까요. '당신이 본 예수는 어떤 분이었습니까'하고 물으시기에 '제가 본 예수님은 대단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제 마음에 있는 분이었습니다. 톤즈 성당은 여기처럼 으리으리하지 않습니다. 허름한 성당에 벽은 포를 맞아서 구멍이 뚫렸는데, 사람들이 성당만 들어오면 얼굴이 밝아지는 걸 봤습니다. 그게 바로 예수의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정진석 추기경님이 '부끄럽습니다'라고 이야기하시더군요.

지금 경제적, 이념적 양극화가 심각해지고 사회적 갈등이 심화하고 있지만 정치권과 사회 지도자들이 이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지도자들이 분열과 갈등을 부추기는 주범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갈등이 심각하고 혼란스러운 시기에 이태석 신부의 리더십이 의미있는 방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태석 신부의 헌신과 실천, 화합, 섬김의 리더십은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세계적인 리더십 센터 그린리프의 켄트 키스 소장은 “이태석 신부의 삶이 섬기는 지도자의 정확한 사례”라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이태석 신부의 리더십 상을 우리 사회에 알리고 확산하는 것만으로 위선과 갈등으로 점철된 정치권 등 사회 곳곳에 큰 경종을 울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비 털어 <부활> 제작...적자지만 적자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자 : 외람된 질문일 수 있겠지만, 영화 제작비는 어떻게 마련하셨나요? 그리고 수익은 어떻게 쓰이는지 알 수 있을까요?

구수환 감독 : 영화 제작비로 3억 원 정도 들었습니다. 협찬은 받지 않고, 사비로 제작했습니다. 이태석 신부의 형인 이태영 신부의 유언으로 맡게 된 일이라, 당시 돈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일단 제작을 시작했습니다. 저의 은퇴 자금과 어머님, 여동생이 보태준 돈으로 비용을 마련했습니다. 제가 이태석 재단에서 10년 간 일한 것을 가족들이 다 알고 있어서, 두말 않고 도와주었어요.

수익으로는 영화관 입장 수익의 절반으로 5천만 원을 받았습니다. 2억 5천만 원 적자지만, 적자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신부님 삶을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 개인적인 기쁨을 넘어 숙명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 재개봉은 제게 정말 큰 의미입니다. 첫 개봉 당시 14만 명이 아닌 1만 4천 명이 관람했는데 영화관 입장에선 재개봉이 도박일 수 있습니다. 원래 이 영화를 이제 영화관 아닌 곳에 틀까 생각한 적도 있는데, CGV 쪽에서 '그 영화 그렇게 하시면 안 돼요, 그 영화 아무데서나 틀지 마세요'라고 하더군요. CGV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자신감을 얻고 롯데시네마와 메가박스, 필름포럼에도 연락했습니다.

처음에는 부활절 앞두고 5~6곳에 틀어야지 생각했는데, 영화관 수가 계속 늘어나서 전국 47곳으로 늘었습니다. 영화관마다 주요 지점에 있는 극장에서 상영하겠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정말 감사해서, 열심히 알려야겠구나 생각하고 부지런히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고구마 캐고, 보리쌀 배달해 보내주신 후원금인데..."

기자 : 영화 이야기에서 약간 빗겨 나, 현재 이사장으로 계신 '이태석 재단'에서는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 이태석 재단도 영화 <부활>의 제자들처럼 생전 이태석 신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겁니까?

구수환 감독 : 이태석 신부의 형 이태영 신부가 돌아가신 뒤 지난해부터 제가 이태석 재단의 이사장을 맡게 됐습니다. 재단은 남수단 의대생들이 졸업 때까지 장학금을 지원하고, 한센인 마을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이태석 신부의 삶의 가치를 일반인에게 알리고 실천을 돕는 교육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기자 : 이태석 재단은 어떤 기금으로 운영되고 있나요? 어려움은 없는지요?

구수환 감독 : 후원자들의 후원금으로 운영됩니다. 지난해 한 여성의 편지 한 통을 받았는데, 87세인 자신의 어머니가 고구마를 캐서 번 돈, 자전거를 타고 보리쌀을 배달해서 번 돈을 모아 재단에 후원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사장이라는 이유로 후원금으로 밥 한 끼 먹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태석 재단은 모든 돈은 사적으로 쓰지 않고, 모든 경비는 각자 사비를 들여서 처리하고 있습니다. 투명성이 전제되지 않으면 신부님의 삶을 이야기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부님은 투병 중에도 목숨을 걸고 봉사했는데, 저희가 사람들에게 이태석 신부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명분을 찾으려면 그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자 : 그래도 최소한의 월급은 받으시겠지요?

구수환 감독 : 이사장 월급은 없습니다. 사무국장 단 한 사람만 월급을 받고, 이사장과 이사들, 지부 실무자들, 모두 다 봉사직입니다. 후원금은 그대로 장학 사업과 교육 사업에 쓰이고 있습니다. 영화 <부활> 이후에 진심이 통한 것 같습니다. 코로나 시대에 오히려 후원자들이 6백 명에서 1천 명으로 두 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는 힘이 있어 버티고 있습니다. 앞으로 전진만 해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절대 후원 가입을 해달라는 부탁은 하지 않습니다. 고발 프로그램을 많이 했고, 재단의 문제를 잘 알기 때문에 더 조심하고, 재단의 올바른 운영 모델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교과서로 기억됐으면"

기자 : 가장 기억에 남는 관객의 평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구수환 감독 : '영화를 보며 세 번 울었다'는 평이 기억에 남습니다. 첫 번째는 남수단 제자들이 '고향의 봄' 노래를 연주할 때, 두 번째는 제자들이 한센인 마을에서 진료할 때, 그리고 세 번째는 제자들이 이태석 신부의 묘지 앞에 의사 자격증과 약사 자격증, 대학 졸업장을 올려놓고 통곡할 때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영화 <울지마 톤즈>의 울음은 그리움과 슬픔이었는데 이번 영화 <부활>에서의 울음은 굉장히 희망적인 울음이었다는 평이 기억에 남습니다.

기자 : 마지막으로,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부탁드립니다.

구수환 감독 : 단 한 분이라도 더 영화를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의 삶을 통해 '이렇게 사는 것이 진짜 행복이구나', 확신을 갖게 되시면 좋겠습니다. 영화 <부활>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교과서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영화관 가기 겁난다고 이야기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속 마크스 쓰시고 꼭 보시면 좋은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코로나19 때문에 삶이 많이 지쳐있고 짜증스럽기도 합니다. 사회에는 온통 싸움투성이입니다. 힘든 시기에, 여러분에게 행복과 위안을 주는 영화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취재·구성 : 조을선, 사진 : 구수환 감독 제공)   
 
수정2021.03.25. 오후 3:48